이 가을에 나는 - 김남주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전옥일까 아니면 대구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염소에서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아이들의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그들과 함께 나도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논둑길 밭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주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을 돈다
저 건너 마을에서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옛마을을 지나며> 1999 -
김남주 시인은1946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전남대 영문과 수학.
1974년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시 ‘진혼가’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소.
시집으로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