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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사찰

장기읍성..

 

 

 

 

장기읍성(浦項 長鬐邑城)은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읍성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386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있으며,
그 구릉 아래쪽으로는 장기천이 동해로 흘러 현내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이 읍성은 일찍부터 동해안을 지키는 다른 읍성들과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이 그 특성이라 하겠다.
동해안의 중요 진성을 들면 울산의 처용암지방,
울주군 강동면 정자리지방,
양남의 수념지방,
감포·장기·포항·영일지방·흥해·칠포지방들인데
이들 지역은 해안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펼쳐져 있고
삼국시대에는 서라벌을 침공하는 왜구를 방어한 군사기지로,
고려·조선시대에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127-2 번지에 소재한 장기읍성은
1994년 3월 17일, 사적 제386호로 지정되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기 위해 지방의 관아와 민가의 취락지를 둘러쌓은 성을 말한다.
고려 때 처음 쌓은 이 성은 동쪽으로 왜적을 막고 북쪽으로는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현종 2년(1011) 당시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으나,
조선조 세종21년(1439)에 돌로 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성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둘레가 1440m이며 3개의 성문과 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작은 성인 옹성,
성벽 바깥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서 만든 치성을 갖추고 있다.
성 안에는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이 있었고,
교육기관이었던 장기향교와 관청이었던 동헌 터가 남아 있는데
동헌은 현재 면사무소 안으로 옮겨 보호하고 있다.
장기읍성이 읍성으로서의 제 구실을 다하던 그날의 사람들도,
그 때의 건물들도 오간데 없고 지금은 민가 10여 채와 산딸기 밭이있다.
산천은 의구하데 인걸은 간데없다던 옛 시인의 감회어린 구절처럼
일찍이 회제 이언적이 동헌 조해루에 서서 본 동해바다,
금분초견(金盆初見) 용창명(湧滄溟)이라했던 해돋이 정경의 그 바다는
지금도 그날처럼 금빛 항아리를 안고 용솟음치고 있다.

 

 

 

 

장기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여서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유배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곳으로 유배 온 사람들이 100여명에 이르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다.
당대의 정치 풍속을 아무리 감안한다하더라도 유배의 사연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별 것 아니고,
제아무리 유배의 명분이 그럴싸하다하더라도 유배당한 자의 삶은 억울한 누명의 흔적을 지울 수가 없다.
우암과 다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우암의 유배는 임금과 왕후가 죽었을 때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벌인 싸움,
이른바 예송논쟁의 산물이었고,
다산의 유배는 그가 성리학의 이념과 다른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그 속바탕에는 남인, 서인, 노론, 소론 간의 얼키고 설킨 권력암투가 자리잡고 있었겠지만
멀리 바라보면 우암의 유배도 다산의 귀양살이도 부질없는 쌈박질의 후유증일 뿐이었다.
다산이 유배 온 첫날밤을 지새운 옥터는 향교 뒤편에 있었다고 하는데 우거진 대나무 숲이 발길을 막았다.
대나무 숲을 스치는 바람결에 뜬눈으로 긴 밤을 지새우는 다산의 장탄식이 들려오는 듯했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하늘이 흐렸으면 차라리 좋았겠다.
그러했다면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해도 오르락내리락 함께 날고 있는 새가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므로
시름의 음영도 흐릿했을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1801년 2월, 다산이 경상도 장기 땅으로 유배를 떠나던 그 날,
정답게 날던 새는 다산 부부의 정겨웠던 날의 한때를 일깨우는 것이었으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아내를 두고 떠나야하는 지아비의 아픔을 얼마나 더 명명백백하게 부추겼을까.

 

 

 

 

'사평의 이별(沙坪別)'에서 다산은 첫 유배길에 오르며 아내와 이별하는 참담한 심경을 이렇게 노래한다.
머뭇거린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끝내 없을 수 없는 이별인 것을/
옷자락 뿌리치고 길을 떠나 가물가물 들을 넘고 물 건넌다/
표정이야 비록 씩씩한 체해도/
마음이야 나라고 다를 수 있으랴/
고개 들어 하늘에 나는 새를 보니/
오르락 내리락 함께 날고 있네/
어미 소는 송아지 돌아보며 울고/
닭도 구구구 제 새끼 부르는데/

 

 

 

 

송아지를 돌아보며 우는 어미 소의 눈물도,
구구구 제 새끼 부르는 어미 닭의 마음도 그날따라 다산의 가슴을 찢는다.
그것은 처자식을 두고 떠나야 하는 다산의 눈물이자 다산의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절개 곧은 선비이자 지조 높은 학자라 하더라도 여느 아비,
여느 지아비처럼‘표정이야 비록 씩씩해도 마음이야 다를 수’없었나 보다.
가물가물 들을 넘고 물을 건너 장기까지 닿기까지 풍찬노숙의 날들은 길고 힘겨웠으리라.
지금이야 고속도로로 차를 달려 대구에서 장기까지 1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지만
한양에서 장기까지 다산을 실은 우마차의 시간은 자신이 처한 삶의 처지,
생의 비애를 들추어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리라.

 

 

 

 


1801년 2월 28일, 한양을 떠난 다산은 사평, 하담, 문경을 지나 3월 9일 장기에 도착한다.
물경 열흘간의 고행길이었다.
옥터에 갇혀 유배 첫날을 보낸 다산은 다음날 관리들에게 끌려나와 읍성 동편 마산리로 내려간다.
시냇가 안쪽 자갈돌밭을 지나 이르게 된 포교 성선봉(成善封)의 집.
이곳에서 다산은 220일간의 장기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성선봉은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술상을 대접하기도 하고 외출을 권하기도 하면서 다산의 참담함을 위로하려 애썼다.
한양에서 온 선비에 대한 집 주인 성선봉의 존경어린 관심과
착한 이웃들의 응대에 힘입어 다산은 차츰 유배생활에 적응한다.
성선봉의 손주들과 마당에서 어울리며 이곳저곳을 살피기도 하고,
갓 태어난 병아리를 돌보며 아이들로 하여금 참새 떼를 쫓고 솔개 후리기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무료함을 달랜다.
다산은 보리타작을 하는 마을사람들과 어울리기고,
담배농사를 짓는 시골 사람들과 마음을 섞으며 장기 농가 민초들의 아픔을 익힌다.
마산리와 지척인 바닷가에서는 갓 시집온 해녀의 물질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어망에 걸려 퍼덕거리는 오징어에게서 자신의 처지를 읽기도 한다.
다산은 장기 유배 7개월 동안의 체험을 120여 편의 시로 남기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당대 농민들의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장기 농가(長鬐農歌) 10장이다.

 

 

 

 

호박 심어 토실토실 떡잎이 나더니만 / 新吐南瓜兩葉肥
밤 사이에 덩굴 뻗어 사립문에 얽혀 있다 / 夜來抽蔓絡柴扉
평생토록 수박을 심지 않는 까닭은 / 平生不種西瓜子
아전놈들 트집잡고 시비 걸까 무서워서라네 / 剛怕官奴惹是非

 

 

 

 

작기가 주먹만한 갓 까놓은 병아리들 / 鷄子新生小似拳
여리고 노란 털이 깜찍하게 예쁘다네 / 嫩黃毛色絶堪憐
어린 딸 공밥 먹는다 말하는 자 누구더뇨 / 誰言弱女糜虛祿
꼼짝 않고 뜰에 앉아 성난 솔개 보는 것을 / 堅坐中庭看嚇鳶

 

 

 

 

장기사람들의 농사짓는 일의 비능률과 고기잡이 방법의 원시성을 목격한 다산은
성선봉을 통하여 문제점을 개선시켜 주기도 하고,
지배계층의 권력을 이용한 구조적인 병폐의 현장과 가난한 민초들의 애통한 마음을 글로 적어두곤 한다.
중병에 걸려도 약제를 알지 못해 무당에게 푸닥거리를 하거나
뱀을 잡아 먹어 보거나 아니면 그대로 죽어가는 불쌍한 민초들을 위해
촌병혹치(村病或治)라는 의서를 만든다.
1801년 10월 20일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한양으로 압송되기까지 다산은
유배의 아픔을 민초들의 교화와 개화로 승화시켰다.
장기 유배 220일은 말 그대로 목민심서의 나날이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포항시는 장기면 일대 부지 1만여㎡에 총 18억원을 들여 유배지 체험촌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조와 충절의 선비문화를 계승하고, 체험촌을 관광자원화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유배 체험촌에는 주자학의 대가 우암과 합리적 실용주의 사상가인 다산 선생의 유배 당시 주거지가 복원되고,
관광객이 당시 유배 생활의 고충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체험 공간이 마련된다.
뿐만 아니라 다산 테마길 조성과 우암 선생의 죽림서원 등도 복원될 계획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우암은 조선 숙종 때인 1678년 4년간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이후 우암의 제자들이 이곳에 죽림서원을 창건해 학문에 정진했다.
이 때문에 장기는 인근 동해안 마을 중에서도 드물게 서원과 향교가 존재했던 곳이다.
시 관계자는 “유배지 체험촌 건립과 함께 인근의 장기읍성, 양포항, 신창 바다낚시 등과 연계한
관광자원 개발로 부가가치가 창출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유배 체험촌 건립을 탓할 일 아니고, 부가가치 창출이 나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유배 체험촌,
제대로 된 부가가치 창출,
제대로 된 관광자원 개발을 통해 국민의 혈세 18억원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점이다.
방방곡곡 유행처럼 번지는, 나쁘게 말하여 돌림병처럼 번지는,
분별없이 자행되는 체험촌 건립의 판박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관건이다.
유배에 대한, 유배 체험에 대한
역사/인문/사회사적 문맥에서의 의미정립이 선행될 때
제대로 된 유배 체험촌 조성이 가능할 것이고,
부가가치 창출이 지금껏 그래왔듯이 경제적 부가가치에 한하지 말고
그것을 넘어서서 문화적 부가가치까지 아우를 때 비로소 포항시가 꿈꾸는 관광자원화의 길이 열릴 것이다.

해설출처: 위키백과
                             daum블로그(river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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